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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일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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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소개

2012년 중국과의 국제교류

목적 및 필요성

방문목적

21세기 국제화 시대에 청소년의 국제교류를 통하여 세계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 어울려 협동과 평화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며, 한국의 민간사절로서 다양한 문화와 관습 등을 소개하고, 다방면에서 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여 세계인의 일원으로서 폭넓은 사고와 감각을 기르고 자질을 함양하는데 목적이 있다.

필요성

급변하는 세계 환경에서 특히 민족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이 서려있는 중국 연길 소재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를 방문하므로써 조국의 소중함을 다시 심어주는 큰 계기가 될 것이며 또한 학생들간의 교류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반자로서 서로간의 이해의 폭을 더욱 넓혀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하도록 한다.

추진 및 세부운영계획

참가인원

  • 참가인원 : 총 20명(인솔교사 5명, 학생 15명)
  • 방문학교 : 용정중학교(구 대성중학교)
  • 방문기간 : 2012년 7월 19일(목)~7월 23일(월)

국제교류 방문 학교 소개

국제교류 방문 학교 소개
항목 내   용
학교명  룡정중학교(구대성중학교)
주 소  吉林省?井市 民?街 789?(길림성 용정시 민성가 789호)
설립연도  1920년2월
학생수  1843명
교원수  146명
교장사무실및이메일주소 (0433)-322-3649 jzr3587@hanmail.net
학교연혁  1920.2~1946.9 대성, 은진, 도흥, 광명,광면녀교, 명신녀교 등 6소중학교 1946.9~1947.7 길림省立 룡정중학교 1952.8~1974.7 길림성 연길현 제1초급중학교 1974.7~1985.1 길림성 연길현 제1중학교 1985.1~현재  길림성 룡정시 룡정중학교  
학교소개  1921년에 천도교 계통의 동흥중학교와 유교 계통의 대성중학교가설립되었다. 당시 이 두 학교는 300여 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교사와 학생들은 항일 민족 해방 교육을 받았다. 일제는 이 두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 10월 용정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영사 경찰을 동원하여 이 두 학교의 교사들을 체포하자,학생들은 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가」「권학가」「학도가」등 가곡과 조선 역사·조선지리를 열심히 가르쳤다. 일제는 자기들이 펴낸 일본어 등 교과목을 강요하였으나 학교에서는 이를 가르치는 척 하면서 비밀리에<최신동국사략 最新東國史略> <월남망국사> <이순신전> <안중근전> <국어국본>등의 교과를 가르쳤다.   
일제는 마침내 1934년 초 두 학교를 합쳐민성중학교를 만들었으나 강한 반대에 부딪쳐 1년 만에 종전대로 분리시켰다.
그 후 일제는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대성중학교 교사 현관의지붕 모양이 고려 시대 건축물의 특색을 띠었다고 하여 방학 중에 허물어 버리고, 일본인에 의한 일본어 교사를 채용하여 감시를강화하였다. 그러나 일본어 시간에 학생들이 벙어리 시늉을 하는 등으로 저항하자 학교의 동쪽 교문밖에 작은 벽돌집을 짓고 일본총영사관이 분주소(分駐所)를 앉혔다. 그러자 교원과 학생들은 교문을 남쪽으로 옮겼다.
   1939년 일제는 위만주국의 교육령에의거하여 두 학교를 '용정국민고등학교'로 개편 병합하고 교장에는 형식적으로 조선인을 앉히고, 일체의 권한을 행사하는 부교장에는일본인을 앉혔으며 일본인 교사들을 배치했다. 합병된 후 학생들은 "밀정을 잡아내자'는 구호를 외치며 7일간 동맹 휴학을 했으며,학생들은 조선인 밀정교사를 잡아 밀정을 않겠다는 서약을 받기도 했다.
1941년에 일제가 다시 이 학교를 '용정 제2국민고등학교'로개편하자 학생들은 물리적으로 대결하려 했고 교사들은 사표를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용정중학교가대성중학교 자리에서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으며, 무수한 인재를 배출해 냈다.